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피 아난 (문단 편집) ==== 국제개입 ==== '관리형 총장'으로 간택된 그는 국제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취임하자마자 [[동티모르]] [[분리독립]]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. 이후 [[IMF]] 외환위기와 국제사회의 비난에 부딪힌 [[인도네시아]]가 분리독립을 허용, [[유엔 평화유지군]](PKO)가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우리나라도 [[대한민국 국군/파병부대#s-4|상록수 부대]]를 파견하였다. 그는 [[이라크]]의 [[사담 후세인]]정부의 사찰을 유도하기도 했다. 이라크의 원유 수출을 허용하고 대신 식량을 제공하는 "석유-식량" 정책을 통해서였다.[* 물론, 이 정책이 말이 많은건 사실이다. 대북 쌀 지원 수준이라고 폄훼하는 부류도 있고, 코피 아난의 자녀와 관련된 비리 스캔들이 터져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. 게다가 이라크 전쟁이 터져 이러한 평화적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.] 전임 총장과는 달리 PKO를 통한 적극적 개입보다는 외교적 또는 정치적인 개입을 우선하는 성향이었다. PKO 사무차장 시절의 경험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평가다. 그리고 [[키프로스]]와 [[북키프로스]]의 [[연방제]] 통일안을 제시한 아난 계획 역시 그의 작품이다. 물론 실패했긴 하지만. 아난 계획에 대해서는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Annan_Plan_for_Cyprus|영문 위키백과]]를 참조하도록 하자. [[르완다 학살]]을 코피 아난의 실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. 사실 개입에 늦은 건 서방 눈치보느라 늦게 반응한 부트로스 칼리의 책임이 크다. 물론, 당시 PKO 사무차장으로서의 책임을 묻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... 본인도 이 일에는 죄책감을 느끼는듯. [[http://www.voakorea.com/a/a-35-2006-12-15-voa16-91211194/1297888.html|기사]] [[9.11 테러]]를 직접 목격한 사무총장으로서, 미국의 [[패권주의]]와 [[이라크 전쟁]]에 적극 반대하였다.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유엔헌장 위반이라고 주장하였다. 하지만 [[미국]]의 침공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